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요즘은 촬영이 아니면 거의 집에 콕 박혀 지낸다. 보정과 브랜딩 작업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한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날 일이 많지 않다. 밥도 대부분 혼자 먹는다. 어느 날 밥을 씹다가 문득 오래전 생각이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이었다. 2000년대 중반쯤, 나는 학교 학생식당 1층 창가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 햇빛을 보며 멍하니 밥을 씹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던 시대였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할 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정도였다. 그 고요한 청승이 나는 꽤 좋았다.
그런데 나의 고상한 혼밥을 놀리던 세력이 있었다. 같은 과 선후배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약간 청승 떠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굳이 꼭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느냐고 했다. 같이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햇빛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청승을 즐겼다. 내 생각은 단순했다. 밥은 입으로 먹는 건데, 왜 누군가가 꼭 필요하지? 그 청승은 학교에서만 떤 것이 아니었다.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경우도 많았고, 혼자 뷔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적도 종종 있었다. 당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나를 괴짜라고 불렀다. 어떤 녀석은 자기는 굶으면 굶었지, 절대 혼자 밥은 못 먹겠다고 했다. 그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후에도 나는 혼자 하는 것들을 꽤 많이 해봤다. 혼자 심야 영화나 조조 영화를 보는 것은 기본이었다. 혼자 제주도를 여행했고, 혼자 일본을 다녔고, 동남아와 유럽, 미국도 혼자 여행했다. 혼자 움직이다 보면 선택의 주체는 언제나 나 한 명뿐이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볼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장면 앞에서 멈출지 모두 내가 결정해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 생기는 편안함이나 타협은 없었지만, 대신 모든 선택이 나의 감각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간들이 레이어처럼 쌓였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있던 시간들이 나의 독특하고 두터운 취향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취향은 지금 나의 사진과 브랜딩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한 번쯤 역으로 따져보는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지금은 혼밥이 너무나 흔한 문화가 되었다. 팬데믹 이후 개인화된 문화는 더욱 빠르게 가속되었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가족, 지역사회, 친구, 단체처럼 여럿이 함께하는 문화가 훨씬 강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친구가 없거나, 아웃사이더이거나, 조금 괴짜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 쉬웠다. 나는 바로 그 당연한 인식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밥은 혼자 입으로 넣는 건데, 왜 혼자 먹는다는 행위에 남의 눈치까지 봐야 했을까.
이후에도 당연한 것들을 의심해보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 왜 공공장소의 광고판에 연예인의 생일을 축하할까. 왜 성심당 앞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설까. 왜 서울에 사는 것이 성공의 기본값처럼 여겨질까. 왜 지방에 살면 안 될까. 부산 사람들은 서울로 가서 일하기를 원하는데, 서울 사람이 부산에서 할 일은 없을까. 왜 많은 사람들은 40대가 내리막이라고 생각할까. 지금부터 시작일 수는 없을까. 왜 나 같은 40대 아저씨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을 한 번 던질까.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무언가에 설렐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직업 안에서도 질문은 이어졌다. 왜 사진작가들이 사용하는 조명은 스튜디오 안에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할까. 야외나 외부에서 조명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걸까. 왜 대부분의 스포츠 사진과 스포츠 프로필은 팔짱을 끼고 찍을까. 왜 댄서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춤이 아니라 포즈를 요구할까. 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사진작가는 멸종된다고 생각할까. 왜 사진을 꼭 포토그래프라는 장르 안에서만 바라볼까. 사진은 이미지의 한 종류일 뿐인데, 그 이미지를 더 발전시키면 더 큰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어느 순간 국룰처럼 굳어진 주장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 기준을 벗어나는 사람을 불편하게 바라본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과 다른 것을 잘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런 의구심을 자주 품었다. 그리고 그 의구심은 내 직업적인 실패 앞에서도 큰 질문을 남겼다.
왜 사진가들은 사진 훈련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까. 이건 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자, 이 직업군 전체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직업 사진작가가 되고자 하면서 사진을 연습하고, 수련하고, 훈련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대부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간다. 그리고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찍고 온다. 그것을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그것은 연습이 아니었다. 경험의 편린에 가까웠다. 그것도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은 경험이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수련하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스튜디오가 무너지고, 직업적으로 실패를 경험했을 때 나는 외부 환경만 탓할 수 없었다. 결국 나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나는 왜 실패했을까. 나는 사진가라고 말하면서 정작 사진을 충분히 수련하고 있었을까.
실패를 경험했을 때 “나는 왜 실패했지?”라고 솔직하게 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뼈아프게 깎아야만 진솔한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피하면 다음으로 갈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사진 연습은 스튜디오 공간에 비너스상을 놓고, 조명을 다양한 각도와 다양한 액세서리, 다양한 거리감으로 반복해서 세워보는 일이었다. 훌륭한 레퍼런스의 조명을 분석하고, 비슷한 결과에 닿을 때까지 계속 찍어보는 일이었다. 빛이 어떻게 흐르고, 어디에서 끊기고, 어떤 거리에서 부드러워지고, 어떤 각도에서 형태를 살리는지 몸으로 익히는 일이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수련이었다. 그리고 그 수련의 레이어는 지금 내가 만드는 이미지의 기반이 되었다.
직업 사진가의 상업 생태계가 레드오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이곳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투잡으로, 나중에는 전업으로. 문제는 레드오션임을 알면서도 그 시장 안에서 힘겨워하고, 어느 순간 생태계 자체를 비난하며 퇴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장은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시장이라는 사실이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수는 없다.
사진가는 자유로운 직업이다.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누가 매일 훈련량을 검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말이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훈련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단련시켜주지 않는 직업이다. 반면, 야구 선수는 밤낮으로 배트를 휘두르고, 요리사는 밤새 레시피를 개발한다. 그런데 사진작가들은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반복해서 세워보고, 레퍼런스를 연구하고, 포토샵을 공부해서 사진을 더 넓은 이미지의 세계로 확장하는 훈련을 꾸준히 이어가지 않는다. 보통 이런 상황이다. 누군가가 스튜디오에 들어온다. 바로 찍는다. 사진을 보낸다. 끝. 나는 그 과정이 늘 이상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계속 “왜?”라고 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혼밥을 어색해했을까. 왜 나는 실패했을까. 왜 나는 사진 훈련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을까. 왜 사진은 한 장의 포토그래프로만 끝나야 할까. 왜 이 이미지는 더 큰 세계로 확장될 수 없을까.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질문들은 나의 사진과 상품과 브랜드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있다. 왜 팬들은 돈을 내고 광고판을 사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생일을 축하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저렇게까지 해야 해? 참 쓸데없다”라고 말하며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팬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형태를 갖기를 원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도시 한복판에 걸리기를 원한다. 생일 축하 광고판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팬심의 증거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고, 공공의 장소에 걸리는 장면이다. 그것은 사랑의 증거이자, 팬덤이 이 사회의 한 흐름이 되고 있다는 현상이다.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소비처럼 보이는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사회적 형태를 얻는 순간일 수 있다. 나는 그런 장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우리 브랜드의 상품으로 가꿔보기로 했다.
당연한 것들, 그리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의구심은 브랜드의 방향이 될 수 있다. 어떤 현상이 보일 때, 일차원적인 비난을 하는 습관을 멈추고 그 안의 가치를 찾는 노력을 해보자. 성심당 앞에 새벽부터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는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긴 줄 속에는 사람들이 빵보다 더 지불하고 싶은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탐구를 해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유난처럼 보이는 행동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다. 당연한 사회적 약속처럼 굳어진 것들을 왜 그런지 따져보고, 사람들이 유난을 떠는 장면 앞에서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고, 나 자신의 사소한 선택과 실패 앞에서도 왜 그랬는지 묻다 보면, 하나하나의 대답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방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브랜드의 방향을 보여주는 나침반이자, 배의 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아이모션은 그런 질문들이 쌓여 생긴 하나의 형태다. 왜 그래야 하지. 그럼 다르게 해보면 안 될까. 이 단순한 질문은 때로 생존의 기술이 되었고, 때로는 수련의 이유가 되었고, 이제는 브랜드의 방향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물을 것이다. 왜.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날선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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