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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나에게는 피자가 없었고, 그들에게는 조명이 없었다

나에게는 피자가 없었고, 그들에게는 조명이 없었다

 

 

사진을 처음 좋아하던 시절, 나는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파리 시청사 앞에서 키스하는 연인. 정확히는 그 사진이 정말 우연히 포착된 장면인지, 혹은 연출된 장면인지는 나중에 알게 된 문제였다. 처음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내게 중요했던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감각이었다. 사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감각. 또 다른 사진이 있었다. 고층 빌딩의 철골 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 인부들. 발밑에는 도시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고, 그들은 마치 길가 벤치에 앉은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진들을 보며 사진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계 속에 숨어 있는 장면을 찾아내는 사람. 남들이 지나쳐버리는 순간을 붙잡는 사람. 위험과 낭만과 우연과 인간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놓을 수 있는 사람. 그 시절의 내게 사진가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났다. 낯선 도시와 골목, 낯선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나만의 장면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사진이란 결국 사진가의 시선이라고 믿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놓치지 않고, 어떤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는가. 그것이 사진가의 실력이고 재능이고 감수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진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했는가의 결과물이었다. 내가 본 것을 어떻게 느꼈는가. 그 감각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미지로 남길 수 있는가. 그것이 내게 사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는 이제 십 년 단위가 아니라 몇 년 단위로도 달라지고 있다. 사진의 고전을 사랑하는 일과, 그 고전의 가치관을 지금 시대의 상업 사진 현장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고전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오늘의 고객은 고전 속 인물처럼 사진작가의 시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취미 사진 시절로부터 수년이 지나, 나는 상업 사진가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이 차이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스냅 사진을 찍으며 돈을 벌기도 했고, 스튜디오를 차려 고객을 받기도 했고, 특정 클라이언트들의 사진을 꾸준히 담당하기도 했다. 그때의 내가 사진에 대한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사진을 꽤 진지하게 대했고, 나의 톤 앤 매너와 빛과 구도와 보정 방식이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의 프레임이 있고, 나의 색이 있고, 나의 분위기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 세계 안으로 들어와 사진을 찍고 갔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준희 작가의 사진이니까 촬영하러 왔다”고 말해주는 고객들이 있었다. 사진작가의 뛰어난 포착 능력과 조명 기술, 보정 능력, 아름다운 톤을 다루는 능력.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좋아해주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내게는 2015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가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내가 만드는 사진의 중심에 사진작가인 내가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고객은 나의 감수성을 사러 오는 것이고, 나의 이미지 안에 들어오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일이 만들어졌고, 그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는 것을. 사진작가의 감수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진작가의 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고객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진은 더 이상 강한 구매 이유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어느 순간, 나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간다는 생각이 들던 시기가 왔다. 물론 그것은 디렉션이 잘못된 스튜디오를 창업하는 바람에 맞은 후폭풍이기도 했다. 내가 모든 것을 시대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나의 판단이 틀렸고, 내가 시장을 충분히 읽지 못했고, 내가 들어간 구조가 나와 맞지 않았던 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실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더 큰 변화도 있었다. 2020년 전후 어느쯤엔가 한국 상업 사진 시장에는 분명한 변곡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사진작가가 너무 많아졌다. 감수성과 실력을 훌륭하게 갖춘 사진작가들이 넘쳐났다. 카메라는 예전보다 접근 가능해졌고, 미러리스는 더 가볍고 쓰기 쉬운 도구로 사진의 문턱을 낮추었으며, 유튜브와 온라인 강의와 오프라인 워크숍이 늘어나면서 사진 기술을 배울 곳도 너무 많아졌다.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가 투 잡 혹은 전업으로 사진작가가 되는 이들이 발에 치일 만큼 많아졌다. 이제 인물을 예쁘고 멋지게 찍어주고, 좋은 색감을 만들고, 세련된 보정을 해주는 사진작가는 인스타그램만 열어도 몇 분 안에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대체제는 어디에나 있었다. 기존의 유명세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고객은 더 이상 한 명의 사진작가 앞에서 선택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진작가를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잘 찍는다는 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잘 찍는다는 말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철학적인 개념을 빌려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진업의 변화는 단순히 카메라가 좋아지고, 사진작가가 많아지고, 인스타그램 안에 대체제가 넘쳐나게 되었다는 시장의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점점 더 자기 경험의 해석자가 되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외부 권위가 정해주던 시대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로 이동했다. 이 변화는 예술과 소비, 브랜드와 사진업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사람의 내면은 경험 × 감수성으로 진동한다. 경험과 감수성은 더하기처럼 단순히 합쳐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험이 한 사람의 감수성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큰 내면의 반응으로 증폭된다. 더구나 그런 경험의 횟수가 쌓인 사람에게 감수성은 단순히 더해지지 않는다. 좋은 영화를 보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는 경험들은 한 사람 안에서 곱하기처럼 작동한다. 경험이 많다는 것은 단지 기억의 목록이 길다는 뜻이 아니다. 그 경험들이 감수성을 통과하며 서로를 자극하고, 연결하고, 증폭시키는 내면의 회로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은 영화를 보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영화 속의 장면 하나 때문에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같은 사진을 보아도 누군가는 잘 찍었다고 말하고 끝나지만, 누군가는 그 안에서 자기 아이의 미래를 보고, 자기 몸의 가능성을 보고, 자기 팀의 자부심을 본다. 경험이 감수성을 만나 곱해지는 순간, 이미지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폭발하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 흐름을 사진업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더 이상 외부의 권위가 정해주는 미의 기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진가는 이제 “좋은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다. 고객은 묻는다. 이 사진 안에서 나는 어떻게 느껴지는가. 내 아이는 어떻게 보이는가. 우리 팀은 어떤 존재처럼 보이는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이 이미지 안에 있는가. 내가 믿고 싶은 미래가 이 사진 안에서 먼저 도착하는가. 사진업의 현장에서 더 이상 사진작가가 중심이 아니다. 적어도 상업 사진의 현장에서는 그렇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진작가의 감수성만을 보기 위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위해 사진을 원한다. 자기 아이의 시간, 자기 몸의 존엄, 자기 팀의 자부심, 자기 미래의 가능성, 자기 욕망의 이미지를 위해 사진을 찾는다. 중심은 사진가의 시선에서 고객의 자기 경험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얼마 전 촬영한 한 아이를 떠올린다. 열 살의 한 KPOP 지망생이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사진작가로서의 관찰이었다. 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춤선은 이미 훨씬 더 큰 무대를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작의 끝과 표정의 방향에는 단순히 아이가 춤을 정말 잘 춘다는 느낌을 넘어, 에너지가 가득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경험과 감수성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수 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스타처럼 보이는가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내가 진짜 아이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내가 화면 속 주인공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은 학원에서 춤을 배우는 아이일지 몰라도, 이 이미지 안에서는 이미 데뷔한 사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 아이의 경험과 감수성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에게는 또 다른 경험과 감수성이 있다. 엄마에게 그 사진은 단순히 아이가 잘 나온 사진이 아니다. 내 아이의 미래가 잠깐 먼저 도착한 것 같은 순간이다. 아직 오지 않은 무대, 아직 오지 않은 데뷔,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이 이미지의 형태로 먼저 눈앞에 놓인 것이다. 그러니까 한 장의 사진 안에는 최소한 세 개의 경험과 감수성이 겹친다. 사진작가가 읽어낸 아이의 이미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 엄마가 먼저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미래. 좋은 상업 사진가는 이 세 층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세 층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동시에 진동하게 만들어야 하며, 경험과 감수성의 저울은 사진작가쪽이 아닌, 아이와 엄마쪽으로 많이 기울어져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최근 만들고 있는 데뷔 패키지는 단순한 합성 상품이 아니다. 누군가를 아이돌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난스러운 이미지도 아니고, 포토샵 기술을 과시하기 위한 그래픽 작업도 아니다. 물론 그 안에는 조명과 촬영과 보정과 합성과 출력물의 질감과 템플릿의 설계가 있다. 버스 쉘터를 찾아다니고, 공연장 앞 현수막을 촬영하고, CD 케이스와 포토카드의 질감을 만들고, 도시 광고의 실제성을 빌려와 한 아이의 이미지와 접속시키는 기술적 과정이 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니다. 기술은 아이의 감수성과 부모의 감수성을 더 선명하게 보이게 만들기 위한 방식과 방법이다. 아이가 자기 자신을 스타처럼 느끼고 싶은 욕망,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먼저 보고 싶은 욕망, 그 두 가지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 이미지가 놓여야 한다. 사진가는 그 욕망을 가볍게 소비시키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동시에 그 욕망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인간은 원래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에 끌린다. 누군가는 더 강해 보이고 싶고, 누군가는 더 아름다워 보이고 싶고, 누군가는 더 큰 무대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사진가는 그 마음을 비웃는 사람이 아니라, 안전하고 아름다운 범위 안에서 그것을 끄집어내어 프레임 안에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미래의 사진업은 점점 더 개인화되는 욕망에 대응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개인의 감수성을 더 선명하고 예술적인 이미지로 번역하는 능력. 나는 그것이 더 개인화된 시대의 사진업에 대한 중요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누군가는 합성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데뷔의 꿈을 꾸는 아이와 엄마에게는 행복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크로스핏 박스 촬영이었다. 나는 그날 조명을 일곱 대나 사용했다. 출장 촬영에서 쉽게 보기 힘든 이동식 모니터 시스템을 만들었고, 근육의 질감과 땀방울, 운동 센터의 어둑한 공기감, 몸이 움직이는 순간의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온갖 신경을 기울였다. 사진작가인 내게 그날의 핵심은 빛이었다. 어떤 각도에서 근육이 살아나는지, 어떤 어둠이 센터의 공기를 더 깊게 만드는지, 어떤 순간에 땀방울이 가장 강한 질감으로 보이는지, 참여자들이 모니터를 보며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경험이 어떻게 촬영 현장의 긴장과 흥분을 끌어올리는지. 나는 그런 것들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행사를 주관한 대표 코치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다른 것을 보았다. 폰카로 찍은 촬영 스케치, 모니터링 스케치, 다들 피자 한 조각씩 손에 들고 찍은 단체사진, 그날의 웃음과 분위기. 그들에게 그날은 조명 일곱 대의 날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그날은 사람들이 함께 운동하고, 서로를 응원하고, 지쳐 있으면서도 웃고, 마지막에 피자를 나누어 먹은 날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피자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조명이 없었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랐을 뿐이다. 그때 나는 다시 생각했다. 사진가가 보는 것과 고객이 기억하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사진가의 경험과 감수성 안에는 조명과 근육과 땀과 어둠이 있었고, 클라이언트의 경험과 감수성 안에는 사람과 화합과 피자와 웃음이 있었다. 사진가는 바로 그 사이를 번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조명을 버리면 안 된다. 근육의 질감도 버리면 안 된다. 땀방울과 어둑한 센터의 공기감과 이동식 모니터 시스템도 버리면 안 된다. 그것들은 내가 가진 기술이고, 내가 가진 감수성이며, 내가 현장을 특별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다만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향해야 하는 곳은 “이 사진작가 조명 참 잘 쓴다”가 아니다. 고객이 느껴야 하는 것은 “그날 우리 참 멋있었다”여야 한다. “우리 박스 분위기가 이렇게 좋았구나”여야 한다. “우리가 함께 버틴 시간이 이런 이미지로 남을 수 있구나”여야 한다. 기술은 사진가의 자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클라이언트의 경험을 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조명은 내가 빛을 잘 쓴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더 강하고 밀도 있는 사람들로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동식 모니터 시스템은 내가 현장을 잘 운영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날의 촬영을 하나의 이벤트로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내가 고객의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기술은 내 안에서만 빛난다. 하지만 고객의 감수성을 읽어낸다면, 그 기술은 고객의 기억 안에서 작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 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진 기술은 기본으로 너무 중요하다. 셔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누르는 것, 흔들리지 않게 찍는 것, 초점을 맞추는 것, 노출을 읽는 것, 조명을 다루는 것, 색을 정리하는 것, 포토샵을 다루는 것, 납품 가능한 파일을 만드는 것. 이것들은 사진작가라는 이름으로 고객 앞에 서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술이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 고객 앞에 서면 안 된다. 돈을 받고 촬영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과 기대와 비용을 맡는 일이다.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채 고객에게 나아가는 것은 자유로운 창작이 아니라 무책임에 가깝다. 다만 문제는 그 기본기를 목적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누가누가 더 사진을 잘 찍는가. 누가 더 조명을 잘 쓰는가. 누가 더 포토샵을 정교하게 다루는가. 이런 기준은 사진가들끼리 말할 때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고객에게는 그것이 대개 당연한 것이다. 고객은 사진가가 사진을 잘 찍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 이후에 중요한 것은 그 기술로 무엇을 해주느냐이다. 클라이언트의 개인적인 감수성을, 사진가의 주관과 전체적인 객관까지 곁들인 다층적인 이미지로 완성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이제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카메라를 막 든 초보자에게 더 경험 많은 누군가가 흔히 건네던 말도 다르게 보인다. “네 시선으로 찍어봐.” “네 시선을 표현해봐.” 혹은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시선이 참 좋네요.”라고 말하던 익숙한 칭찬도 그렇다. 한때 이 문장들은 강력했다. 나도 그 문장들을 믿었다. 사진가는 자기 시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모두에게 같아 보이지만, 사진가는 자기만의 눈으로 세계를 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놓치지 않고, 어떤 장면 앞에서 멈추며, 어떤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가. 그것이 사진가의 개성이자 실력이며, 사진가가 세계와 맺는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말은 완전히 틀리지 않다. 사진가에게 자기 시선이 없으면 안 된다. 자기 시선 없는 사진가는 결국 남의 레퍼런스를 수행하는 사람에 머물기 쉽다. 하지만 AI 혁명 이후, 더 개인화된 인본주의적 가치가 강해지는 시대 안에서 그 문장의 무게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내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느끼고 싶은 것을 내가 어떻게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내 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피사체의 욕망, 클라이언트의 감정, 시장의 흐름, 감상자의 해석 가능성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복합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사진가의 주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한 위치를 찾아야 한다. 내 시선을 중심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진 기술을 통해 타인의 감수성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제 사진가는 자기 시선을 증명하는 사람을 넘어, 타인의 감수성이 이미지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AI 혁명 이후의 사진업이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록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기록만으로는 부족해지는 영역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있었던 순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먼저 보고 싶어 한다. 아이는 아직 데뷔하지 않았지만 데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선수는 아직 프로가 아니지만 프로필 사진 속에서 프로 선수처럼 보이고 싶다. 무용수는 아직 큰 무대에 서지 않았지만 공연 포스터 안에서 이미 주역처럼 보이고 싶다. 크로스피터들은 그날의 운동 기록만이 아니라, 함께 해낸 사람들의 분위기와 자부심을 이미지로 갖고 싶다. 이것은 거짓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이미지를 조금 먼저 보여주는 일에 가깝다. 사진은 현실을 복사하는 도구에서, 현실이 되고 싶은 방향을 먼저 경험하게 만드는 장치로 확장될 수 있다. 나는 데뷔 패키지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것은 더 개인화된 시대의 사진업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잘 찍는다는 말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과거의 기준에서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높은 철골 구조 위에 올라가 위험천만하게 점심을 먹고 있는 인부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강렬한 프레임으로 남기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파리 시청사 앞에서 키스하는 연인을 포착하고, 도시의 낭만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하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진은 여전히 위대하다. 단, 클래식으로서. 사진 역사에서 그 장면들이 가진 힘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상업 사진가로서 오늘의 고객을 만나는 나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본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을 고객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조명과 질감과 색이 고객의 기억 안에서도 같은 무게를 가질 것인가. 어쩌면 고객은 내 조명보다 피자를 더 기억할 수 있다. 어쩌면 아이는 내가 감탄한 춤선보다 자신이 스타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 어쩌면 부모는 사진가의 보정 디테일보다 아이의 미래가 먼저 도착한 것 같은 감정을 더 깊게 간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사진가는 자기 경험과 감수성만으로 세계를 찍는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경험과 감수성이 어디에 있는지 감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기술과 주관과 객관적 판단으로 더 선명하게 시각화하는 사람이다. 사진가는 더 이상 혼자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설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는 피자가 없었고, 그들에게는 조명이 없었다. 나는 이 문장 안에 상업 사진가가 오래 붙잡아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가에게는 카메라와 렌즈와 조명과 포토샵과 수많은 레퍼런스와 자기만의 미학이 있다. 클라이언트에게는 자기 아이, 자기 몸, 자기 팀, 자기 하루, 자기 관계, 자기 미래, 자기 결핍, 자기 욕망이 있다. 사진가는 그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진가는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다. 내가 가진 조명으로 그들이 가진 피자를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진 기술로 그들이 가진 감정을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진 세계관 안으로 타인을 억지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강하고 아름답고 가능한 존재로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지금 사진업을 다시 생각하는 방식이다. 사진은 작가의 기록이자 창작물이며, 작가의 상상력과 내면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업 사진의 현장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진은 이제 피사체와 클라이언트의 개인적 감수성을 우선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감수성을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사진가는 다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된다. 잘 찍는 사진가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누군가의 경험을 그 사람답게 시각화해주는 사진가는 여전히 드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