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향

절박한 인간에게 AI는 활이 된다

절박한 인간에게 AI는 활이 된다

 

 

 

 

나에게 AI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이 질문이 단순한 기술의 문제처럼 보였다. 어떤 기능을 쓸 수 있는가, 어떤 문장을 더 빠르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떤 아이디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계속 대화를 하고, 실제 내 일과 연결해보고, 촬영과 브랜딩과 글쓰기와 상품 기획 속에 AI를 집어넣어보면서 점점 분명해진 것이 있다. AI는 나의 아이디어를 대신 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거의 모든 아이디어는 내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AI는 그 아이디어를 대신 생산하는 기계라기보다, 내 안에 이미 있던 것들을 정리하고, 편집하고, 연결하고, 다음 형태로 밀어주는 도구에 가까웠다. 그것은 창작의 주체라기보다 편집자였고, 발명가라기보다 조준기였으며, 내 생각을 대체하는 두뇌라기보다 내 안의 생각들이 더 빠르게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확장적 장치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조금 놀랐다. 나는 생각보다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허황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제 내 세계관 안에서 작동할 법한 아이디어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사람이었다. 막연히 멋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식의 공중에 뜬 상상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해온 사진과 조명, 무용과 스포츠, 여행과 독서, 예술적 경험과 상업 현장, 시장의 반응과 실패의 기억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들이었다. 아이들의 현재를 찍되 그들이 프로가 되었을 때 만날 이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 무용수와 아이돌 지망생에게 아직 오지 않은 무대를 먼저 경험하게 하는 것, 팀 사진을 단순한 단체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시그니처 아트워크로 만드는 것. 이런 생각들은 AI가 갑자기 내게 건네준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다만 예전에는 그것들이 지금처럼 빠르게 연결되지 못했고, 지금처럼 문장과 상품과 전략의 형태로 정리되지 못했을 뿐이다.

 

팬데믹 이전에도 나는 사진작가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사진을 찍었고, 일을 했고, 장비를 다뤘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지금처럼 모든 생각이 하나의 방향으로 압축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이디어가 없었다기보다, 아이디어가 서로 충돌하고 연결될 만큼 내 안의 압력이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실패는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실패는 사람을 벼린다. 칼날을 갈듯 불필요한 것을 벗겨내고, 남은 것만 더 선명하게 만든다. 팬데믹 이후의 시간은 내게 그런 과정이었다. 무엇이 나를 살릴 수 있는지, 무엇이 쓸모없는 시간 낭비인지, 어떤 관계와 어떤 선택이 나를 흐리게 만드는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친구도 거의 다 줄었다. 인생이 좁아졌다기보다 압착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눌려 들어가고, 그 압력 속에서 내가 정말 해야 하는 일만 남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성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공은 더 이상 멋진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식량을 비축하는 문제에 가까웠다. 인간은 오늘 먹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음 계절을 생각하고, 사냥의 실패를 대비하고, 더 나은 도구를 만들며 살아남았다.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미래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계획했다. 내게 사진업도 어느 순간 그런 문제가 되었다. 오늘 촬영 하나를 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일도 살아남고, 다음 계절에도 살아남고, 이 시장 안에서 내 이름과 내 문법으로 오래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도구, 다른 방식, 다른 세계관이 필요했다. 그런 절박함 속에서 나는 AI를 만났다.

 

그래서 나에게 AI는 장난감이 아니다. 나에게 AI는 활에 가깝다. 활은 사냥감을 대신 정해주지 않는다. 활은 배고픔을 대신 느끼지 않는다. 활은 숲을 읽지 않는다. 어디에 동물이 지나갔는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지금 쏴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결국 인간이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활을 든 인간은 이전과 다른 거리를 갖게 된다. 돌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야만 했던 사냥에서, 멀리서 조준하고 쏘는 사냥으로 넘어간다. 수고는 줄어들고, 사거리는 길어지고, 명중률은 높아진다. AI도 내게 그렇다. AI는 내 아이디어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내 아이디어의 사거리와 명중률을 바꿔준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신 정해주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정확한 문장과 더 선명한 구조와 더 빠른 실행으로 바꿔준다.

 

예전의 나에게 AI가 있었다면 지금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꽤 중요한 생각이다. 도구가 아무리 뛰어나도, 도구를 만나는 인간의 상태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도구는 평균적인 용도로만 쓰인다. 예전의 나는 지금만큼 압축되어 있지 않았고, 지금만큼 절박하지 않았고, 지금만큼 사진업의 다음 형태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AI를 만났다면 아마 조금 편리한 검색 도구나 문장 도우미 정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실패 이후의 나는 더 날카로워졌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쓰기 싫어하게 되었고,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생각하려 한다. 그래서 지금의 AI는 내게 단순한 편의 도구가 아니라, 내 안에 쌓여 있던 압력을 배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흩어져 있던 생각은 문장이 되고, 문장은 카드뉴스가 되고, 카드뉴스는 상품이 되고, 상품은 브랜드 전략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책상 앞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AI와 대화를 나누며 문장을 정리할 수는 있지만, 그 문장의 원천은 결국 몸으로 겪은 시간에서 온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장면 앞에서 멈추는지, 어떤 실패를 견디고 다시 움직이는지는 실제 세계를 지나가며 알게 된다. 그래서 내게 AI는 현실을 대신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에서 얻은 감각을 더 멀리 보내주는 도구에 가깝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 AI는 평균적인 답을 줄 수 있지만, 이미 몸으로 무언가를 겪은 사람에게 AI는 그 경험을 구조화하는 장치가 된다.

 

서울의 6월 말, 30도에 가까운 날이었다. 하늘은 속이 뻥 뚫릴 만큼 파랬고, 구름은 거의 없었다. 해를 피할 그늘도 마땅치 않았다. 오랜만에 대중교통으로 유랑하게 된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평범한 6월의 어느 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 다른 디렉션으로 움직이는 한 사진작가가 있었다. 나는 카메라와 삼각대를 둘러메고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움직였다. 경복궁에서 3호선을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헨리넥 셔츠는 점점 땀으로 젖어갔고, 긴 머리 아래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는 채로 예술의 전당과 국립국악원을 돌았다. 하지만 원하던 소스는 나오지 않았다. 사진작가에게 이런 순간은 익숙하다. 눈앞에 풍경은 있지만, 내가 찾는 장면은 없는 시간.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내 안의 그림과 맞지 않는 시간. 몸은 더워지고, 장비는 무거워지고, 발은 점점 아파오는데 수확은 없는 시간. 그 시간에는 생각이 조금씩 예민해진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이게 정말 필요한 일인지, 오늘 이 도시에서 내가 찾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는지 계속 묻게 된다.

 

목표했던 템플릿 이미지를 다 얻지 못해,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내가 찾는 장면은 없었다. 다시 이동했다. 퇴근길 만원 버스에 낑긴 채로 대학로로 갔다. 몸은 이미 지쳐 있었고, 하루는 꽤 많이 기울어 있었다. 햄버거 하나를 얼른 먹고 다시 목표했던 창덕궁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도착한 장면은 예상과 달랐다. 볼품없었고, 내가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실망감이 밀려왔다. 하루 종일 서울을 가로질렀는데, 내가 찾던 장면은 계속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냥은 늘 그런 식이다. 처음부터 사냥감이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발의 통증이 먼저 오고, 포기의 이유가 먼저 온다. 그럼에도 조금 더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 다른 장면을 만난다.

 

포기하지 않고 창덕궁 앞으로 이동했을 때, 마침내 내가 찾던 장면이 나왔다. 창경궁과 서울대병원 사이, 저녁놀이 물러가며 점점 고요해지는 거리의 한 지점. 흔한 도시의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 내가 찾던 가능성이 있었다. 너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가능한 장면이었다. 그 평범한 장소가 누군가의 미래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무대처럼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약 90분 동안 다양한 장노출 브라케팅 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는 불빛과 구조, 도시의 배경,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밀도. 아직 어떤 형태로 완성될지 외부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은 단순한 도시 풍경을 넘어 내가 앞으로 전개하려는 작업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그날 찍은 것은 버스정류장이었지만, 실제로 보고 있던 것은 버스정류장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을 배경으로 보지 않았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누군가의 미래가 걸릴 수 있는 자리로 보았다.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진이 아니라, 현실의 결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욕망의 형태를 끌어내는 이미지. 빛이 머무는 방식,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흐름, 정류장이 가진 구조와 도시의 배경이 만들어내는 균형. 특별하지 않은 장소가 어떻게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되는지, 그 안에서 어떤 긴장과 리듬이 만들어지는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 감각을 붙잡기 위해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오늘의 현실을 채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풍경 채집이 아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이미지의 재료로 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과 몸이 그 공간 안에 들어왔을 때, 그곳은 평범한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하나의 포스터가 될 수 있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아이가 자기 광고 이미지를 만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무대에 오르기 전의 무용수가 자신의 미래를 먼저 바라보는 배경이 될 수도 있으며, 성장 중인 선수가 자신을 이미 프로처럼 감각하는 장면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꺼내어 더 강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 내가 꿈꾸는 하이퍼리얼리즘은 그런 방향에 가깝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이미 있지만 아직 누구도 꺼내지 않은 미래의 형태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일이다.

 

문득 생각했다. 오늘 서울에 나와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6월의 뜨거운 도심에서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국립국악원에서 국립극장으로, 다시 대학로와 창덕궁 앞으로 이동하며, 미래의 브랜딩 상품을 위한 소스를 사냥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누군가는 풍경을 찍으러 갔을 것이고, 누군가는 취미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울의 아름다움을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것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오늘의 현실을 채집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런 목적으로 서울을 유랑한 사람은 나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확신은 때로 외로움을 동반한다. 남들과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감각은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꽤 고독한 일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아직 시장이 완전히 알아보지 못할 때,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아직 명확한 이름을 얻지 못했을 때, 내가 찍은 소스가 당장 어떤 상품으로 완성될지 나조차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고요한 상태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불필요한 것들이 걷히고, 내가 진짜로 보고 있는 것과 붙잡아야 할 본질이 또렷해진다. 그 시간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이 결국 나를 더 정확한 방향으로 성장시키고 있다고 믿는다. 남들과 다를 수 있다는 것. 나의 감각과 서사, 그리고 그것들이 쭉 연결된 나만의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 그 세계관 안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이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실제 상품과 시장과 이미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계속 앞으로 밀고 간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많다. 장비를 잘 쓰는 사람도 많다. 보정을 잘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진을 가지고 미래의 욕망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브랜딩 언어와 AI 시대의 생산성으로 묶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 조금 더 좋은 사진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언어화되지 않은 시장에 사진의 문법을 심으려 한다. 유소년 선수에게 프로팀 미디어데이의 문법을 가져오고, KPOP 지망생에게 포토카드와 앨범 자켓의 미래 이미지를 먼저 경험하게 하며, 무용수에게 자신의 몸이 가장 기뻐할 이미지의 언어를 조명으로 완성해주는 것. 팀에게는 단체 기록을 넘어 하나의 정체성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진을 기록이 아니라 브랜딩의 재료로 볼 때 가능해진다.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르는 사람을 넘어, 한 사람과 팀과 브랜드의 미래 이미지를 설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일을 하려면 사진만 잘 찍어서는 부족하다. 조명을 알아야 하고, 몸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스포츠와 무용과 아이돌 이미지 문법을 알아야 하고, 부모의 심리와 학원의 욕망과 SNS의 후킹과 상품화 구조를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 내게 그 세계관의 재료는 독서와 여행과 예술적 경험에서 왔다. 독서를 통해 나는 감각을 개념으로 압축하는 법을 배웠고, 여행을 통해 선택의 순간 앞에서 내 취향을 믿는 법을 배웠고, 예술적 경험을 통해 결과물의 미세한 결을 판단하는 감각을 길렀다. 어느 도시를 좋아하는지, 어떤 빛을 원하는지, 어떤 이미지가 내 것이 아닌지, 어떤 문장이 오래 살아남는지, 어떤 몸의 언어가 진짜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AI는 그 나를 확장하는 두뇌가 되었다. AI를 잘 쓰는 능력은 AI 안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AI 바깥에서 쌓아온 삶의 두께에서 온다. 많이 읽은 사람은 질문에 구조를 만들고, 많이 떠난 사람은 답을 고를 취향을 갖고, 오래 예술을 만진 사람은 결과물의 미세한 결을 판단한다. 내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AI는 그저 평균적인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는 사진과 조명, 여행과 독서, 예술과 실패, 절박함과 생존 감각이 이미 쌓여 있었다. 그래서 AI는 나에게 평균적인 아이디어 생성기가 아니라, 세계관을 확장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발의 통증을 느꼈다. 늦은 저녁, 퇴근을 마친 시민들이 하나둘 버스에 올라탔고, 그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어딘가 다른 흐름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서울 시민도 아닌 내가 이 도시를 가로질러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이 묘하게 이방인의 감각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내가 선택한 창작자의 삶이 그들과는 전혀 다른 리듬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도 스쳤다. 버스 구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오늘 있었던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한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분명 지쳐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오늘 하루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늘 얻은 것은 단순한 사진 몇 장이 아니었다. 내가 남들과 다른 디렉션을 그리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조용한 확신이었다. 뜨거운 도심의 열기, 속이 뻥 뚫리도록 파랗던 하늘, 저녁놀이 물러가며 고요해진 창경궁과 서울대병원 사이의 버스정류장, 땀에 젖은 셔츠, 아픈 두 발, 만원 버스의 피로감,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장면을 얻었다는 사냥꾼의 든든함. 그 모든 감각이 내 안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두 발의 아픔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실제로 걸어온 거리와 선택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그 통증은 내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였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는 기록이었다. 내가 오늘 실제로 걸었다는 것, 실제로 움직였다는 것, 실제로 실패하고 다시 이동하고 결국 찾아냈다는 감각이 그 통증을 통해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의 감각은 AI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AI는 버스정류장을 찾아 대신 걸어주지 않고, 땀에 젖은 셔츠와 아픈 두 발을 대신 겪어주지 않는다. 실패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할지 말지 결정하는 망설임도, 마침내 원하는 장면 앞에 섰을 때 올라오는 사냥꾼의 든든함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몸으로 얻어온 장면과 감각을 다시 문장으로 세우고, 상품의 구조로 연결하고, 더 먼 방향으로 쏘아 보내는 일을 도와줄 뿐이다. 그래서 AI가 나를 창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실패 이후 벼려진 내가 AI를 창의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AI는 경험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AI는 절박함을 대신 느끼지 않는다. AI는 내가 왜 성공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살아낸 경험이 많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는 사람에게 AI는 놀라운 도구가 된다. 절박한 인간에게 AI는 활이 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활을 들고 있다. 어디를 쏴야 하는지도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내가 발견한 사냥터에서, 내가 만든 활로, 내가 바라본 미래를 향해 쏘고 싶다. 그날까지 나는 계속 걸을 것이다. 뜨거운 도시를 지나고, 실패한 장소를 지나고, 마침내 하나의 장면 앞에 멈춰 서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 장면을 향해, 내가 가진 활을 다시 당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