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AI에게 답을 구할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연습은 하지 않는다.
취향이 없는 사람은 심판만 쳐다본다.
나는 좋은 물건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비싼 물건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옷, 좋은 카메라, 좋은 렌즈, 좋은 브랜드를 아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검색하면 된다. 커뮤니티에 물어보면 된다. 리뷰를 보면 된다. 누가 입었는지, 누가 쓰는지, 어떤 제품이 품절인지, 어떤 브랜드가 지금 뜨거운지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검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남의 착용샷을 오래 본다고 생기지 않고, 장비 리뷰를 백 편 본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정보는 쌓일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쌓인다고 기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준 없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정보는 취향을 만들어주기보다 더 깊은 혼란을 준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맞는 말 같고, 이 사람의 선택도 설득력 있고, 저 사람의 반박도 그럴듯해진다. 그렇게 사람은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더 모르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하는 척할 뿐이다. 옷을 고르고, 카메라를 고르고, 렌즈를 고르고, 촬영 방식을 고르고, 사업의 방향을 고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선택이 맞는지 누군가가 판정해주기를 기다린다. 커뮤니티의 댓글, 동호회의 반응, 시장의 유행, 인플루언서의 사용기, 알고리즘의 숫자, 그리고 이제는 인공지능의 답변까지.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심판을 세워두고 산다. 내가 원하는가보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가 먼저 오고, 내 기준에 맞는가보다 이 선택이 외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그러니 물건을 사는 일조차 종종 자기표현이 아니라 판정 대기 상태가 된다.
얼마 전 어느 커뮤니티의 글을 보았다. 한 사람이 305만 원짜리 가죽 재킷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옷이고, 작년에는 실제로 사기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는 마음이 더 흔들린다고 했다. 가격이 부담스럽고, 가죽이 얇은 것 같고, 같은 가격이면 다른 선택지도 많고, 무엇보다 카페나 SNS에 계속 보이다 보니 자신도 사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옷을 묻고 있었지만, 사실 옷만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욕망의 출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이 옷을 진짜 원하는가. 아니면 자주 보았기 때문에 원하게 된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가. 아니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가. 이 질문은 구매 상담처럼 보였지만, 조금 더 깊게 보면 판정을 요청하는 글이었다. “제가 이 욕망을 가져도 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가까웠다.

그 글에는 백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답했다. 가격이 부담되면 사지 말라고 했다. 월급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할부는 위험하다고 했다. 그 가죽은 얇다고 했다. 핏이 애매하다고 했다. 그 가격이면 다른 브랜드가 낫다고 했다. 고민이 된다면 사지 않는 것이 맞다고 했다. 대부분 틀린 말은 아니었다. 305만 원짜리 옷을 사면서 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현실감 없는 일이다. 소재와 핏과 가격을 따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 많은 댓글 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질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옷을 원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어떤 아웃핏을 갖추고 싶습니까. 당신에게 옷은 무엇입니까. 그 재킷은 당신의 몸과 생활과 시간 속에서 어떤 자리를 갖게 됩니까. 그 법정에는 많은 배심원이 있었지만, 정작 사건의 본질을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돈을 무시하는 취향은 오래가기 어렵다. 그러나 돈은 취향의 조건일 수는 있어도 취향의 출발점은 아니다. 어떤 옷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돈부터 묻는 것은 순서가 뒤집힌 일이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소비는 정확히 그렇게 움직인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나는 얼마짜리를 살 수 있는가가 먼저 등장한다. 나에게 어울리는가보다 남들이 인정하는가가 먼저 등장한다. 내 삶에 필요한가보다 지금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는가가 먼저 등장한다. 그렇게 취향의 빈자리는 돈과 브랜드와 타인의 반응으로 채워진다. 취향이 빈곤한 사람은 물건을 고르지 못한다. 그는 허락을 구한다. 이 옷을 사도 되는지, 이 가격을 지불해도 되는지, 이 브랜드를 입어도 우스워 보이지 않는지, 이 선택이 남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물건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줄이려 한다.
이것이 잔인한 지점이다. 취향이 없는 사람은 비싼 물건을 사도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그 물건은 몸에 걸쳐져 있지만, 기준은 여전히 밖에 있다. 누가 알아봐주는가. 누가 칭찬하는가. 커뮤니티에서 인정받는가. 지금 유행에서 밀리지 않는가. 그러니 물건을 산 뒤에도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살지 말지를 묻고, 사고 나면 잘 산 것인지 묻고, 입고 나면 어울리는지 묻고, 시간이 지나면 아직 괜찮은 선택인지 묻는다. 결국 그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계속 판정을 기다린다. 그는 심판을 원한다. 심판이 있어야만 자신의 선택이 진행된다. 심판이 없으면 옷도, 장비도, 취향도, 때로는 삶의 여러 결정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기 안에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취향이 없다는 것은 이렇게 피곤한 일이다. 취향이란 남의 반응을 수집하는 능력이 아니다. 남의 반응이 없어도 자기 선택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옷의 본질은 결국 아웃핏의 표현이다. 아웃핏은 단순히 옷을 잘 입는 기술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기 몸과 생활과 태도를 외부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떤 사람은 반듯하고 매끈한 옷에서 자신을 찾고, 어떤 사람은 오래 입어 무너진 옷에서 자신을 찾는다. 누군가는 고급 브랜드의 완성된 실루엣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이름이 덜 알려진 옷이 자기 몸에 맞게 변해가는 과정을 좋아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옳은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 언어인가이다. 취향은 남의 순위표에서 1등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내 삶에서 오래 살아남을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래서 질문은 처음부터 달라야 한다. 이 옷이 좋은 옷인가가 아니라, 이 옷이 나의 문장인가. 이 옷을 입은 나는 내 삶 안에서 자연스러운가. 이 옷이 없어도 내가 설명되는가, 이 옷이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가.
이 문제는 옷에서 끝나지 않는다. 카메라와 렌즈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수백만 원짜리 신형 고급 렌즈가 출시되면 시장은 빠르게 달아오른다. 예약 판매가 열리고, 품절이 되고, 리뷰가 쏟아지고, 샘플 이미지가 공유된다. 사람들은 해상력을 보고, 초점 속도를 보고, 무게를 보고, 이전 세대와의 차이를 비교한다. 물론 그런 정보는 필요하다. 장비는 실제로 결과에 영향을 준다. 좋은 렌즈는 좋은 도구이고, 좋은 도구는 작업자의 가능성을 넓힌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렌즈가 정말 나의 이미지에 필요한가. 내가 만들고 싶은 사진에 그 렌즈가 반드시 필요한가. 나는 그 렌즈로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이 질문이 빠진 상태에서 신형 렌즈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표현의 욕망이라기보다 소유의 욕망에 가까워진다.
렌즈를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더 좋은 화질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피사체와 내가 어느 거리에서 만날 것인지 정하는 일이다. 배경을 얼마나 압축할 것인지, 공간을 얼마나 넓게 보여줄 것인지, 움직임을 어느 속도로 붙잡을 것인지, 인물과 배경 사이의 관계를 어떤 긴장으로 세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본질을 잊은 채 누군가를 따라간다. 유명한 작가가 쓰니까 좋은 렌즈가 되고, 인플루언서가 추천하니까 필요한 렌즈가 되고, 동호회에서 인정받으니까 갖고 싶은 렌즈가 된다. 그렇게 렌즈는 이미지를 설계하는 도구가 아니라 계급장이 된다. 카메라는 사진을 만들기 위한 기계가 아니라 자신이 어느 층위의 사람인지 증명하는 배지가 된다. 장비는 언어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훈장으로 착각한다.
유행적인 사진도 마찬가지다. 어떤 색감이 반응을 얻으면 다들 그 색감으로 몰린다. 어떤 구도가 뜨면 비슷한 구도가 반복된다. 어떤 촬영 상품이 돈이 된다고 하면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겉으로는 시장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자기 판단의 부재를 시장 감각으로 포장하는 일에 가깝다. 자기 서사와 논리 없이 누군가의 결과만 복제하려는 움직임. 남의 장비를 따라 사면 남의 시선이 따라올 것이라는 착각. 남의 색감을 따라 하면 남의 세계관도 함께 옮겨올 것이라는 착각. 남의 브랜딩을 따라 하면 남의 시장도 내 것이 될 것이라는 착각.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조금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스포츠 사진작가로 일하며 높은 퀄리티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다. 야외에서 조명을 세우고, 한낮의 태양과 싸우고, 아이들을 스포츠 포스터의 언어로 세우고, 무용수의 몸을 빛의 궤적으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렌즈는 많지 않다. 표준줌, 망원줌, 장망원줌. 사실상 세 개면 충분하다. 세 개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대부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니멀리즘을 자랑하려는 말이 아니다. 더 많은 렌즈를 가진 사람이 틀렸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내 경우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비교적 분명하다. 필요하지 않은 장비는 아무리 좋아도 필요하지 않다. 아무리 새롭고, 아무리 선명하고, 아무리 시장이 열광해도 내 시선의 방향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작업의 도구가 아니다.
취향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에 도달하기까지가 어렵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나는 어떤 물건과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선택은 간결해진다. 반대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선택은 끝없이 복잡해진다. 옷장에는 옷이 늘어나는데 입을 옷은 없고, 제습함은 가득 차는데 찍고 싶은 이미지는 흐릿하다. 카메라는 좋은데 세계관은 없다. 더 선명한 센서와 더 빠른 AF와 더 비싼 렌즈는 갖췄지만, 정작 그 장비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비어 있다. 도구가 늘어나는 것과 사람이 선명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소유가 늘어난다고 주관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관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소유하려 한다. 물건이 많아지면 자신도 조금은 더 분명한 사람이 될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브랜딩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린다. 어느 장르가 뜬다고 하면 비슷한 상품이 쏟아진다. 어떤 문구가 반응이 좋다고 하면 다들 비슷한 말을 쓴다. 어떤 이미지가 알고리즘을 탔다고 하면 비슷한 썸네일이 늘어난다. 겉으로는 전략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공포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 나만 모르는 정답이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저 사람이 벌었다는데 나는 왜 하지 않느냐는 공포.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질문을 생략한 채 시장의 소문을 따라간다. 그러나 소문을 따라가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그 길이 정말 돈이 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졌을 때, 그 길은 이미 붐비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얼마에 팔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가보다 얼마나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가를 계산한다. 자기만의 차이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더 낮은 가격과 더 잦은 노출뿐이다.
왜 사람은 이렇게 자주 심판을 원하는가.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고른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판단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부른다. 커뮤니티를 부르고, 전문가를 부르고, 동호회를 부르고, 시장의 숫자를 부르고, 알고리즘의 반응을 부른다. 물론 조언은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은 나의 blind spot을 보여줄 수 있고, 시장의 반응은 내 착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다. 그러나 심판이 많아질수록 선택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의 판단 근육을 쓰지 않으면, 그 근육은 점점 약해진다. 결국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고도 더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 된다.
이제 더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다. AI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앞으로 더 많은 선택지를 보여줄 것이다. 어떤 옷을 사야 하는지, 어떤 렌즈가 좋은지, 어떤 촬영 상품이 유망한지, 어떤 문구가 반응이 좋을지, 어떤 브랜딩 전략이 가능한지 끝없이 제안할 것이다. 과거에는 커뮤니티 댓글 백 개가 우리를 흔들었다면, 앞으로는 AI가 백 가지 시뮬레이션을 몇 초 만에 던져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도구다. 동시에 기준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도구다. 내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 많은 가능성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더 세련된 혼란이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가능해 보이고, 이 전략도 맞는 말 같고, 저 방향도 유망해 보인다. 그렇게 사람은 AI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AI에게 끌려간다. 과거에는 커뮤니티에 허락을 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허락을 구하게 된다.
어쩌면 AI는 기준 없는 사람에게 가장 완벽한 심판처럼 보일 것이다. 빠르고, 친절하고, 논리적이고, 수많은 선택지를 비교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심판도 내가 어떤 경기를 하고 싶은지는 대신 정해줄 수 없다. AI는 답을 정리해줄 수 있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대신 원해줄 수 없다. 기준 없는 사람은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좌를 내어준다. 그러면 AI는 그의 취향을 선명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평균으로 더 부드럽게 안내한다. 남들이 할 법한 말, 남들이 좋아할 법한 이미지, 남들이 이미 가고 있는 방향을 더 그럴듯하게 포장해준다. 도구는 새롭지만, 인간이 비어 있으면 결과는 평균으로 돌아간다.
AI 시대의 핵심 능력은 정보를 찾는 능력이 아닐 것이다. 정보는 점점 더 저렴해지고, 더 빠르고, 더 풍부해질 것이다. 비교도 쉬워지고, 분석도 쉬워지고, 시뮬레이션도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것은 자기 안의 이니셔티브다.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설정하는 능력. 내가 먼저 방향을 선언하는 능력. 내가 먼저 기준을 세우고, AI를 그 기준을 선명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는 능력. 주관이 있는 사람에게 AI는 엄청난 힘이 된다. 흐릿한 생각을 구조화하고, 막연한 감각을 언어화하고, 흩어진 욕망을 하나의 전략으로 엮어준다. 반대로 주관이 없는 사람에게 AI는 평균의 거대한 증폭기가 된다. 그는 더 많은 답을 얻게 되지만, 더 자기다운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주관이 강하다는 것이 닫힌 태도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자기 취향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오류 가능성도 알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언제나 시장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믿는 방향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다. 내 시점에는 병목이 있을 수 있고, 내 논리에는 빈틈이 있을 수 있으며, 내 취향은 때때로 나를 고립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고집이 아니라 균형이다. 확고한 취향과 열린 태도. 선명한 주관과 수정 가능한 사고. 자기 기준과 배움의 자세. 이 균형을 가진 사람은 강해질 것이다. 기준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선택지 앞에서 더 흔들리고, 기준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도구를 통해 더 선명해질 것이다. AI는 사람을 대신해줄 수 있지만, 사람 대신 원할 수는 없다. 원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이 옷, 제가 사는 게 맞을까요. 이 렌즈, 제가 사는 게 맞을까요. 이 사업, 제가 따라가는 게 맞을까요. 이 질문들은 때때로 필요하지만, 가장 앞에 놓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 먼저 와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어떤 옷을 원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인가. 나는 어떤 브랜드가 되고 싶은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나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인가. 이 질문 없이 물건을 사면, 우리는 남의 취향을 산다. 이 질문 없이 장비를 사면, 우리는 남의 시선을 산다. 이 질문 없이 AI를 쓰면, 우리는 남의 평균을 더 빠르게 복제한다. 취향은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은 자기 심판권의 문제다. 그리고 자기 선택을 스스로 판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자주, 더 정교하게, 더 그럴듯한 방식으로 허락을 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판권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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