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의 사칙연산 - 독서와 곱셈
창의성의 반대말은 카피다
최근 EBS에서 제작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같은 이야기를 한 그룹의 아이들은 책으로 읽고, 다른 그룹의 아이들은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시청하게 한 뒤, 이야기 속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영상을 본 아이들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영상 속에서 이미 제시된 수도꼭지와 샘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 반면 책을 읽은 아이들의 그림은 저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둥근 샘을 그렸고, 누군가는 네모난 샘을 그렸고, 또 다른 아이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같은 이야기를 접했지만 한쪽은 이미 본 장면을 복제했고, 다른 한쪽은 자기 머릿속에서 장면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나는 그 실험을 보며 독서의 문제가 단순히 교육이나 문해력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창의성의 문제였고, 더 정확히 말하면 카피에서 벗어나는 능력의 문제였다.
창의성의 반대말은 무지가 아니다. 나는 창의성의 반대말이 카피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은 배울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장면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고 남이 만든 이미지만 계속 따라 하게 된 사람은 자기 브랜드를 만들기 어렵다. 요즘은 무엇이든 쉽게 참고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수많은 사진이 쏟아지고, 유튜브를 켜면 수많은 영상이 재생된다. 핀터레스트에는 세계 최고의 레퍼런스들이 끝없이 모여 있다. 물론 참고는 필요하다. 나 역시 수많은 사진가와 영화, 광고, 음악, 문장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참고와 카피는 다르다. 참고는 내 안의 배경지식과 충돌해 새로운 해석을 만들지만, 카피는 눈앞에 있는 장면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싶어지는 욕망에 가깝다. 창작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많이 보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다양한 작품과 표현을 접해야 시야도 넓어지고, 좋은 기준도 생긴다. 다만 많이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 것을 자기 안에서 소화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없다면,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들기 전에 이미 본 것을 꺼내 쓰게 될 수 있다.
나는 레퍼런스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사진을 시작한 이후 수많은 사진가들의 작품을 보았다. 핀터레스트를 뒤졌고, 사진집을 샀고, 인스타그램을 보았고,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그 이미지들을 따라 하며 성장했다. 좋은 여행 사진을 보면 저런 장면을 찍어보고 싶었고, 멋진 조명을 보면 비슷하게 재현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모든 창작자는 어느 정도의 모방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모방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모방에서 멈추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레퍼런스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특정 이미지를 저장해두고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보아온 수많은 사진과 영화, 여행의 장면들, 책 속 문장들이 하나의 거대한 라이브러리처럼 쌓여 있었다. 이제는 어떤 촬영을 준비할 때 특정 사진 한 장을 꺼내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라이브러리 속의 수많은 이미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형태로 결합된다. 마치 여러 악기가 하나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연주되듯, 수많은 이미지들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합쳐지며 하나의 방향을 만든다. 지금의 나는 레퍼런스를 적게 본다기보다, 이미 충분히 많이 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 안에서 얼마나 오래 숙성되었는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민음사 세계문학을 좋아했다. 도스토옙스키와 헤르만 헤세, 카뮈와 톨스토이를 읽었고, 문장 속에 오래 머무르는 시간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었고, 책 안의 세계가 좋았다. 특히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헤밍웨이였다. 지금도 그의 소설을 떠올리면 사진으로 치면 ‘공기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독자를 위해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문장으로 표면만 보여준다. 인물의 감정도, 사건의 의미도, 풍경의 분위기도 과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절제가 더 강한 몰입을 만든다. 사진으로 비유하면 넓은 암부를 남겨두는 방식과 비슷하다.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명부가 더 선명하게 살아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록 독자는 그 빈 공간을 스스로 채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 속 공기를 직접 호흡하게 된다.
나는 헤밍웨이를 읽으며 처음으로 독서가 상상으로 숨 쉬는 행위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소설 속 배경은 나의 현실과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간의 온도와 냄새, 침묵과 긴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작가가 모든 것을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독자는 그 여백 속에서 자기만의 장면을 만들고, 자기만의 공기를 불어넣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진에서 암부와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그런 독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문장만을 단서로 남기고, 나머지를 독자의 상상 속에 맡긴다. 나는 아마 그 시절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장면을 생성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철학과 역사, 인문학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대학 강의와 과제보다 그런 책들을 더 우선했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전공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진 기술만 놓고 본다면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상상력의 밑거름이 된 시기도 없었다. 사진 기술은 배울 수 있다. 조명도 배울 수 있다. 카메라 사용법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해석하는 힘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사진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잘 찍는 기술만이 아니다. 무엇을 보고, 왜 그것에 반응하며, 그것을 어떤 언어와 이미지로 다시 바꿔낼 것인가에 대한 해석 능력이다. 20대의 독서는 당장의 기술적 성취와는 멀어 보였지만, 훗날 내가 사진을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디렉션과 브랜딩의 언어로 바라보게 만든 중요한 토양이었다.
그 독서가 가장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시기는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여행하던 시절이었다. 여행은 나에게 장면을 제공했고, 독서는 그 장면을 해석하는 언어를 제공했다. 쿠바를 여행했을 때 나는 낡은 올드카와 원색의 도시, 유쾌한 사람들, 시가와 럼, 카리브해의 뜨거운 공기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래 남은 것은 선택지가 제한된 사회에서 느꼈던 이상한 선명함이었다. 슈퍼마켓에는 고를 수 있는 스낵과 맥주, 음료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나는 그 단순함 속에서 취향의 권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 쉽다. 반면 선택지가 좁아진 세계에서는 내가 무엇을 고를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며, 무엇을 더 소중하게 느끼는지가 선명해진다. 그런 통찰은 여행 정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철학과 인문학, 독서와 경험이 쿠바라는 구체적 장면과 만나면서 만들어낸 생각이었다.
현재 내가 아이모션을 이끌며 사용하는 여러 개념들도 결국 그런 연결의 산물이다. 일곱 대의 조명 시스템을 단순히 조명 일곱 대라고 부르지 않고 세븐 엔진이라고 부르는 것, 사진의 작업 과정을 셰프가 한 접시의 요리를 완성하는 과정처럼 바라보는 것, 조명의 밝기와 암부의 선택을 브랜딩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이런 언어들은 사진 기술서만 읽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조명과 엔진, 요리와 사진, 브랜드와 명암, 춤과 음악, 위스키와 은유가 내 안에서 계속 맞물리며 생겨난 것이다. 나는 그런 연결을 좋아한다. 위스키를 마실 때도 단순히 맛있다거나 독하다고 끝내지 않는다. 스파이시함은 단점이 아니라 거칠지만 매력적인 가수의 목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고, 피트 향은 축축한 스코틀랜드의 날씨를 떠오르게 만든다. 훌륭한 댄서의 관절의 움직임과 유연함은 레가토 사이에서 등장하는 스타카토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감각과 지식이 교차할 때, 창작자는 자기만의 언어를 얻는다.
레퍼런스만 보는 창작자는 결국 자기 브랜드를 만들기 어렵다. 눈앞의 이미지를 많이 저장할수록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은 커지지만, 그것이 반드시 자기 언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장한 이미지는 많지만 해석의 언어가 없으면 결국 손은 가장 익숙한 장면을 따라간다. 남들이 만든 구도, 남들이 만든 색감, 남들이 만든 조명, 남들이 만든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어 자신의 것처럼 내놓게 된다. 물론 시장은 한동안 그것을 허락한다. 비슷하게 잘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고, 유행을 빠르게 따라가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단계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브랜드는 반복 가능한 카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브랜드는 자기 안에서 반복적으로 솟아나는 언어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창작자에게 반드시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지식을 많이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독서는 카피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이다. 영상을 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좋은 사진을 보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레퍼런스를 모으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나 역시 그렇게 시작했고,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참고한 장면을 그대로 다시 만드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레퍼런스를 계속 소비하는 단계에서는 카피의 유혹이 강하다. 그러나 독서와 경험, 여행이 함께 쌓여 있다면 레퍼런스들은 더 이상 레퍼런스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서로 연결되고 변형되고 재해석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특정 사진가의 사진도 아니고, 특정 영화의 장면도 아닌, 나만의 언어가 되기 시작한다.
AI 시대에는 이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정보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 레퍼런스도 누구나 찾을 수 있다. 문장도 이미지도 점점 더 쉽게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차이는 어디에서 생길까. 결국 자기만의 곱셈 능력에서 생긴다. 무엇을 보고 무엇과 연결할 것인지, 어떤 경험을 어떤 언어로 바꿀 것인지, 어떤 장면을 자기 브랜드의 문법으로 만들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독서는 그 연결 능력을 기르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방식이다. 영상 볼 시간을 조금 줄이고, 책을 읽을 따뜻한 환경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삶 속에 잠깐의 공백을 만들고 책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 커피나 차 한 잔을 준비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조명을 켜두며 그 시간을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꾸미는 것. 혹은 지하철을 타야 할 때 책 한 권을 들고 나서는 것. 그렇게 문장 안에 머무르다 보면 단어와 줄글을 음미하고, 단락이 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펼쳐보게 된다. 소설이라면 그 세계를 더 깊이 즐기고, 비문학이라면 그 책을 쓴 사람의 말소리와 사고의 흐름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뇌는 계속 장면을 만들고, 연결을 만들고, 자기만의 언어를 준비한다.
브랜드를 만들 때 자주 빠지는 착각도 여기에 있다. 우리 브랜드를 있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더 비싸 보이는 인스타그램을 만들고,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럴듯한 분위기를 입혀야 한다는 조급함. 그러나 그것은 자기 안의 언어가 아직 충분히 빛나고 있지 않다는 고백에 가까울 수 있다. 카피와 타인의 문법을 따라가는 일은 결국 자신의 것만으로는 ‘있어 보이기’ 어렵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우연히 운이 좋아 보이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희박하고, 설령 찾아온다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더 세련되고 더 비슷하게 잘하는 다른 브랜드가 금세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창의력과 언어가 이미 고유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 굳이 있어 보이려고 과하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이미 있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있어 보이는 껍데기를 씌우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쌓여 있는 세계를 밖으로 꺼내는 일이다. 그 세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읽고, 보고, 경험하고, 오래 생각한 것들이 자기 안에서 연결되며 조금씩 만들어진다. 자기만의 공간 안에서든,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든, 그 순간의 공기와 풍경 속에서 다른 생각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것을 꺼내어 새로운 곳에 펼쳐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독서를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믿는다. 독서는 창작자의 생존 기술이다.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사람, 자기 언어를 갖고 싶은 사람, 남들이 이미 만든 장면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독서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다. 읽지 않는 사람은 본 것에 기댈 뿐만 아니라, 기댈 만한 것이 없을 때 쉽게 멈춘다. 본 것에만 기대는 사람은 카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작자는 레퍼런스를 많이 본다고 창작자가 되지 않는다. 본 것을 자기 안에서 해체하고, 다른 경험과 연결하고, 다시 자기 언어로 꺼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창작자가 된다. 반대로 읽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한다. 아직 없는 장면을 자기 안에서 먼저 만든다. 그리고 그 장면을 현실로 꺼내온다. 나는 그것이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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