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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빛을 기다리던 시대는 끝났다

 

 

빛을 기다리던 시대는 끝났다

 

 

인상주의에 대한 글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사진술의 등장이 화가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는 일이 오랫동안 회화의 중요한 능력이었다면, 어느 순간 과학과 기술은 그 일을 인간의 손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차갑게 해낼 수 있는 장치를 세상 앞에 내놓았다. 누군가의 얼굴을 남기고, 어떤 장소의 풍경을 보존하고, 지나간 시간을 이미지로 붙들어두는 일은 더 이상 화가만의 고유한 권력이 아니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인상주의를 단순히 빛을 예쁘게 그린 미술 사조로만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기술이 예술에게 던진 질문 앞에서, 예술이 스스로의 생존 방식을 다시 찾아낸 장면에 가까웠다.

 

기계가 현실을 복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화가들은 현실을 더 똑같이 따라 그리는 방향으로만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의 외곽선 너머를 보기 시작했다. 사물의 정확한 형태보다 그 위를 지나가는 빛, 시간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색, 공기 속에서 흔들리는 인상, 눈으로 보았지만 손으로 고정하기 어려운 순간의 감각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니까 인상주의는 기술에게 밀려난 회화의 패배가 아니라, 기술 때문에 회화가 더 회화다워지는 방향을 발견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똑같이 그리는 일은 기계가 할 수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회화는 빛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지점이 지금의 사진과 너무 닮아 있다고 느낀다. 사진 역시 처음에는 기록의 기술이었다. 누가 그곳에 있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얼굴이 어떤 시간에 존재했는지를 증명하는 도구였다. 사진은 오랫동안 현실의 조각이었고, 기억의 대체물이었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손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진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진은 여전히 기록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어떤 사진은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강하다. 하지만 사진이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이 조금 안일한 믿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역사는 언제나 기술의 발전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물어왔고, 사진 역시 그 질문에서 예외일 수 없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고, 미러리스가 빨라지고, 초점은 사람의 눈과 움직임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고감도와 연사와 글로벌 셔터 같은 기술들이 사진가의 신체 능력을 확장해주었다. 여기에 포터블 플래시와 지속광, 배터리형 조명과 무선 동조 시스템이 더해지면서 사진가는 더 이상 좋은 빛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에는 장소와 날씨와 시간대가 사진가에게 많은 것을 결정해주었다면, 이제 사진가는 그 조건을 일부 뒤집을 수 있게 되었다. 태양이 너무 강하면 노출을 죽이고, 배경이 산만하면 배경을 어둡게 만들고, 평범한 운동장 위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빛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장비가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이 사진가에게 새로운 문법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다.

 

최근 내가 하고 있는 스포츠 이미지 작업도 결국 그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아이모션의 사진은 아이가 축구공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아이가 자기 삶에서 한 번쯤은 정말 중요한 선수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부모가 휴대폰 화면을 넘기다가 잠시 멈추고, 가족 단톡방에 보내고 싶고, 아이가 커서 다시 보았을 때 “내가 저때 저렇게 빛났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그것은 현실에 없던 거짓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었지만 아직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았던 가능성을 끌어내는 일에 가깝다. 아이는 이미 그 안에 에너지와 표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진가는 빛과 방향과 공간을 통해 그것이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사진을 단순히 찍는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진은 찍는 것이지만, 어떤 사진은 설계하는 것이다. 빛의 방향을 정하고, 피사체의 자세를 정리하고, 배경의 밀도를 낮추거나 높이고, 색의 온도를 조절하고, 현장의 경험까지 포함해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조립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도구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아니라, 그 셔터가 눌리기 전까지 사진가가 무엇을 보고 있었고,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의도했는가에 있다. 나는 이 차이가 앞으로의 사진가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사진이 현실을 발견하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사진은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사진이 연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윤리와 기록의 힘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상업 사진, 스포츠 미디어, 퍼포먼스 이미지, 프로필 사진처럼 누군가를 하나의 이미지로 세워야 하는 영역에서는 더 이상 우연히 잘 찍힌 사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은 이미지를 본다. 예쁜 사진도 많고, 선명한 사진도 많고, 감성적인 색감도 넘쳐난다. 그 안에서 어떤 이미지가 멈춰 보이려면, 사진가는 이제 더 분명한 방향을 가져야 한다. 왜 이 빛이어야 하는지, 왜 이 자세여야 하는지, 왜 이 공간이 이렇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AI의 등장이 다시 한 번 사진가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본다. AI는 이미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든다. 더 이상 사람들은 단지 분위기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오래 놀라지 않는다. 화면 속에서는 얼마든지 빛나는 배경이 만들어지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그럴듯한 표정으로 서 있으며, 현실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몇 초 만에 생성된다. 그렇다면 사진가는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하는가. 단순히 “이건 진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짜라는 말은 중요하지만, 진짜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제 사진가는 실제 현장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피사체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는지, 빛과 공간을 어떻게 설계해 현실의 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AI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현장의 설계 능력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AI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지만, 촬영 현장에서 한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몸의 방향을 잡아주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가 스스로 멋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경험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AI는 빛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지만, 실제 운동장 위에서 해가 기울기 전 30명의 아이를 일정한 퀄리티로 촬영하기 위해 조명을 세우고, 바람과 배터리와 동선과 시간과 표정을 동시에 통제하는 노동까지 수행하지는 않는다. 결국 AI 시대에 더 강해지는 사진가는 카메라만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 생산 시스템으로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기술은 늘 예술을 위협하는 것처럼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기술은 예술을 없애기보다 예술의 게으른 부분을 먼저 밀어낸다. 카메라가 회화를 끝낸 것이 아니라, 회화가 단순한 재현에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사진을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라, 사진가에게 더 빠르고 더 정교한 판단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AI 역시 사진을 끝내기보다, 방향 없는 사진과 설계 없는 감성을 먼저 흔들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예쁜 분위기만 흉내 내는 사진, 기술을 멀리한 채 감성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는 사진,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진은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많아지고, 사람들의 시선은 더 빨리 지나가며,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분명한 구조와 강한 의도를 가진 이미지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예술을 더 정직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늘 비슷한 두려움을 말하지만, 그 기술을 자기 언어로 바꿀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장르가 열렸다. 인상주의의 화가들이 빛을 다시 보았듯이, 지금의 사진가도 빛을 다시 보아야 한다. 다만 이제의 빛은 창가로 들어오는 빛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진가가 직접 들고 가는 빛, 피사체를 다시 세우는 빛, 공간의 의미를 바꾸는 빛, 현실보다 더 강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빛까지 포함한다. 나는 앞으로의 사진이 바로 그 빛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은 기록에서 시작했지만, 기록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회화가 재현에서 벗어나 빛과 인상과 감각의 세계로 나아갔듯이, 사진 역시 현실의 복제에서 벗어나 현실을 설계하는 이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기술이 있다. 기술은 차갑지만, 그 기술을 어디에 겨누느냐는 인간의 일이다. 조명은 기계지만, 그 조명이 누구를 어떻게 빛나게 할 것인가는 사진가의 태도에 달려 있다. 카메라는 도구지만, 그 도구로 무엇을 증명할 것인가는 결국 한 사람의 방향에 달려 있다.

 

나는 결국 이 시대의 사진가가 해야 할 일이 더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좋은 장면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 좋은 장면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빛을 발견하는 것을 넘어, 빛을 창조해야 한다. 피사체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피사체가 자기 안의 가장 강한 형태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우연이나 감각이라는 말로 흐리지 않고, 기술과 방향과 설계로 반복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지금 사진에서 가장 흥미롭게 바라보는 변화이고, 어쩌면 AI 시대에 사진이 다시 한 번 예술로 살아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